"농업 희생하고 공산품 얻겠다고?"
[속보, 사회] 2003년 09월 15일 (월) 22:12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가 선언문을 채택하지 못해
사실상 협상이 결렬된 채 현지시각으로 지난 14일 폐막됐다. 이번
칸쿤회의는 현지에서 항의시위를 벌이던 한국농민 고 이경해씨의 자결로
파란을 겪기도 했다.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농업개방 문제는 국내에서도 적잖은 파장을
가져왔으나 한국정부의 대응이 적절치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됐었다.
<오마이뉴스>는 하반기 최대 정국현안 가운데 하나로 떠오를 농업개방 문제
관련 특별기획을 마련했다. 첫번째로 이번 칸쿤회의가 남긴 상처를
진단하고, 시민사회단체들의 평가를 담았다...<편집자 주>
[특별취재팀 : 박형숙 강이종행 이승훈 기자]
▲ 결렬된 WTO 각료회의
지난 10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개막식에서 수파차이 파닛팍디 WTO 사무총장이 연설하고 있다. WTO
각료회의는 끝내 결렬되므로써 국내 농업은 한숨 돌렸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지적이 대부분이다.
ⓒ 연합뉴스 김영섭
"국민들은 우릴 보고 웃기는 사람들로 취급하겠지만 우리는 0:5로 질
게임을 0:4로 지게 하려고 노력한다. 국제협상에서 수입국의 협상이란 그런
것이다."
멕시코의 칸쿤에서 열린 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개도국들과
세계 NGO단체들의 저항으로 결렬된 채 폐막된 직후 한 농림부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하지만 국내 농민계는 "일단 환영" 하면서도 이번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협상력 부재를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특히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은
"미국을 위시한 농산물 수출국들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에
불과하다"고 못박으며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우선 김 전 장관은 이번 협상을 바라본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1994년 우루과이협상 때도 이러다가 당했다. 일단 개도국 등의 반대로
결렬된 뒤 미국과 초국적기업들은 이면협상을 통해 반대 국가들을 회유하고
협박한 뒤,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끝내 타결시키는 것이 전략이다.
이번 협상이 결렬됐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뒷거래'와 더불어 동원되는 것은 "언론을 통한 여론분열"이라고 김
전 장관은 지적한다. 수입개방을 요구하고 있는 국가들은 언론을 통해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어야 공산품 수출시장이 열린다"는 논리를
퍼뜨린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 전 장관은 "통상협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잘라 말했다.
"우루과이라운드 때도 우리 정부는 사료를 많이 살테니 소를 적게
수입하도록 해달라고 제안했지만 공염불이었다. 사료는 사료대로 소는
소대로 협상이 따로 진행된다. 한 품목에 관계하는 로비스트며 기업,
국가가 제각각인데 '주고받기식'이 어떻게 가능하겠나. 농업을 희생하고 그
대가로 공산품을 얻겠다는 것은 우리들의 착각이다."
이번 회의에서도 이같은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공산품에 경쟁력이 있는
국가로서 우리 정부는 수출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선진국과 개도국에
공산품의 관세인하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렬된 이번 회담은 특별 각료회의 형태로 홍콩에서 올해 12월 15일 다시
열린다. 그 사이 WTO 농업위원회 차원의 비공식 회의와 개별 국가간 치열한
로비가 예상된다. 그 결과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관세인하,
저관세수입물량 확대, 정부 보조금 삭감 등의 가이드라인이 결정될
것이라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94년 UR협상 때도 이러다 당했다"
지난 13일 발표된 칸쿤회의 선언문 초안에 따르면, 우리의 농산물 시장은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전면적인 개방이 불가피하게 됐다. 우선 이번
회의는 농민계뿐 아니라 정부대표단 역시 "우리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정도로 실패한 협상이었다.
애초 농림부가 정한 우리측 협상목표는 △관세 상한 철폐 △저관세
의무수입량(TRQ) 확대반대 △개발도상국 우대 △농산물의 비교역적 성격
강조 등이 주요 골자였다. 하지만 관세인하와 저관세 의무수입량 확대를
막아내지 못했고 개발도상국 유지도 힘든 상황이다. 최종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칸쿤회의 선언문 초안에 반영되었던 이번 협상 상황을 분야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개발도상국 유지 불투명
우리측 협상목표 중 각료 선언문 초안에 반영된 것은 개도국 우대 하나에
불과하다. 그나마 개도국 우대 조항은 양자협상에서 상대국이 개도국으로
인정해야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별 실효성이 없다.
미국이나 유럽연합은 우리가 OECD 가입국이고, 10대 교역국이라는 점을
들어 한국의 개도국 인정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관세 대폭 인하
이번 회의의 가장 큰 관심사항은 관세 부분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는
그나마 나라별·품목별 관세의 차이를 두었으나 이번에는 그 차이마저
없애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칸쿤회의가 우루과이회의보다 매섭다"고
평가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선언문 초안에 따르면, 농업개도국마저 일부 특별품목(SP)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농산물의 급격한 관세인하, 일정 비율의 농산물만 제외하고 급격한
관세인하(스위스 공식), 일괄적인 5% 이하 저관세 설정 등의 방안이
논의되었다.
여기에 우리 정부는 관세상한을 철폐하자는 입장으로 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관세율 100%가 넘는 마늘, 고추, 양파 등
142개 농산물은 개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최종결정은
추후협상과제로 남겨진 상태지만 미국이 25% 대폭 인하를 주장하고 있어
최하 50%까지는 관세가 인하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저관세 의무수입량(TRQ) 확대
우리 정부는 이번 협상에서 저관세 의무수입량(TRQ) 확대반대의 입장으로
임했지만 이 역시 관철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연합을 위시로 한 농수산물 수출국은 관세상한을 웃도는 품목은
다시 저관세 의무수입량 확대 의무화를 포함시켜 사실상 수입국과
개도국에게 "관세를 내리든가, 수입을 늘리든가"의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개방은 어떤 식으로든 피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농수산물의 비교역적 성격 강조 실패
농민계는 지속적으로 농수산물의 비교역적 성격을 강조해 왔다. 한마디로
농수산물은 일반 공산품과 다르다는 것. 공장에서 당장 찍어낼 수 있는
상품이 아니므로 WTO 협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고 이경해
한농연 회장이 자결하기 전 "WTO 협상에서 농업을 제외시켜라"라고 외친
것도 그런 까닭이다.
다만 이번 회의에서 쌀처럼 민감한 품목은 '비교역적 관심사항'을 인정할
수 있다는 유보조항을 채택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점진적으로
관세를 인하해야 하는데 쌀의 경우 국내쌀이 수입쌀에 비해 4∼5배가 비싼
형편이라 관세를 100%대로 유지한다해도 경쟁력을 유지하기는 힘든
형국이다.
정부 보조금 삭감
추곡수매제 등 국내 보조금도 2000년 기준으로 삭감을 의무화했다.
▲ 지난 13일 한국 농민단체 회원들이 멕시코 현지에서 "WTO 반대,각료회의
저지" 시위를 벌이고 있다.
ⓒ 민중의 소리 제공
정부 협상력 부재, 농민 죽음으로 내몬다
농민단체 및 시민사회단체가 지적하는 WTO협상의 가장 큰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농림부는 이번 회의에 출발하기 앞서 "개도국 유지 위해
노력하겠다" "최소 개방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외교통상부의
'주고받기식'(GIVE & TAKE) 논리에 힘을 잃고 말았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더욱이 WTO 각료회의가 '다자간 협상' '일괄타결'
'전원합의제'라는 협상구조를 갖추고 있어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반대의지를 표시할 수 있었다"며 정부의 협상의지와 협상력 부재를 강하게
성토했다. 한농연은 "지난 8월 중순 이후 미국-유럽연합 간의 DDA 농업협상
절충안이 마련되고 농산물 수출개도국 21개국 그룹이 형성되는 등 급격히
변화했던 협상 지형에 대해 한국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는 이번 회의에서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10개국과 세력을 형성하려
했으나, 각료선언문 초안 발표 직후 스위스가 탈퇴 의사를 밝히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국은 스위스, 일본 등과 함께 비교역관심국
진영(NTC-6)에 속한다. NTC 그룹은 농산물의 특수성을 인정하며
일반상품처럼 개방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 입장을 둔 나라들이다.
하지만 이번 협상은 수출국 입장인 미국-유럽연합과 21개
개발도상국(G-21)이 협상주도권을 장악해 협상 초기부터 한국의 주장과는
거리가 먼 선언문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했다. 여기에 더해 국내
여론은 "이경해씨의 죽음이 그나마 선언문 채택을 막아냈다"며 "농민의
죽음을 우리 농업과 식량주권 사수를 위한 협상력 제고에 제대로 활용조차
못한 정부의 무능력"을 비판하는데 모아지고 있다.
서울 한농연 사무실에 마련된 고 이경해씨 빈소를 방문한 한 농민은 "매번
WTO 협상 때마다 우리가 죽을 수는 없지 않냐"며 "정부는 배수의 진을
치겠다는 각오로 올 12월로 연기된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내 몸은 먼저 가지만, 정신만은 지켜볼 것이다"라는 고 이경해씨의 마지막
유언을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