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협상결렬, NGO '승리집회'
[분석] 칸쿤 협상 결렬의 의미 - 미국식 일체화 일단 제동
칸쿤=임은경 기자, 이정무 기자
WTO 각료회담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14일 오후 7시. 한국 투쟁단이
농성장을 차리고 5일간 밤샘 투쟁을 벌여왔던 코바 거리 분수대 광장에서는
꽹과리, 징, 북이 등장하는 흥겨운 풍물 한마당이 벌어졌다.
한국 투쟁단이 각료회담 무산과 민중의 승리를 자축하는 '승리집회'에 외국
활동가들을 초청했던 것이다. 이날 집회는 한국 및 외국 각 단체 대표들이
투쟁단을 치하하고 '승리의 기쁨'을 나누자는 발언 등을 하며 축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7시가 조금 넘어서 시작된 집회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정광훈 한국 투쟁단 단장은 "다들 잘했다"고 투쟁단을
치하하며 "이 여세를 WTO가 완전히 끝장날 때까지 몰아가야 하며,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태국 NGO인 'Focus on the Global South'에서 온 메리 론 말리그 씨는
"칸쿤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것은 이곳에 모인 민중의 단결된 힘"이었다고
이날 각료회의 무산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민중들의 의사 표현이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 개도국 정부들을
자극했고, 오늘 낮 회의장에서 개도국 정부들은 농업과 싱가포르 이슈에
대해 단결된 모습으로 일관되게 반대했다"고 전했다.
이날 낮 회의 폐막 직후에는 미국의 로버트 졸릭 무역대표부 대표가
"현재의 상황을 볼 때 (협상을) 기한내에 타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며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표명하기도 했다.
비아 캄페시나 필리핀 지부에서 온 마리아 엘레나 씨는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참가단(200여 명)이 온 것에 대해 놀랐고 여러분의 투쟁에
감사한다"며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우리 비아
캄페시나는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라파엘 알레그리아 비아 캄페시나 대표는 "지금 칸쿤 시내 곳곳에서 승리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으며 비아 캄페시나의 청년 캠프에서도 이곳에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말하고, "오늘 우리는 WTO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WTO가 최종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며
"루차(Lucha)!"를 외쳤다. 루차는 스페인어로 투쟁이라는 뜻이다.
이번 회담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첨예한 쟁점은 단연 농업 분야였다. 전기환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이번 WTO 회담이 무산된 것에 대해 "일단
환영한다"면서, "그러나 농업이 WTO 협상에서 완전히 제외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아직 남아있다"고 말했다.
한 시간 가량의 집회를 마치고 분수대 옆 풀밭에서 댄스 파티가 벌어졌다.
악기는 꽹과리, 징, 북과 멕시코 전통 악기의 화음. 어느 나라나 자국의
고유한 놀이 문화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중에서도 한국 투쟁단의 풍물은
어디서나 단연 인기였다. 소리의 크기로나 흥겨움으로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 한국 투쟁단의 농담섞인 평이다.
흥겨운 음악과 춤을 통해 외국의 동지들과 교감과 우정을 나눈 후 한
시간쯤 지나 자리는 마무리되었고 한국 투쟁단도 숙소로 돌아왔다.
칸쿤 협상 결렬의 의미 - ‘미국식 일체화’ 일단 제동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제5차 각료회의는 결국 어떤 합의도 이뤄내지
못하고 폐막되었다. WTO의 최고의사결정 기구인 각료 회의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99년의 시애틀 회의에 이어 두 번째이다. 이에 따라
내년 말까지를 시한으로 정한 도하개발아젠다(우르과이라운드의 다음 번
라운드)의 타결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칸쿤 회의가 결렬된 것은 아프리카,카리브해,태평양(ACP)그룹 등
개발도상국들이 ‘싱가포르 이슈’(무역원활화 등 4개부문)에 관한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한 데 따른 것이다. 채택되지 못한 각료선언문
초안은 이 이슈들 중에서 무역원활화, 정부조달 투명성 부문은 즉시 협상을
개시하고, 투자와 경쟁 부문은 나중에 시작한다는 쪽으로 돼있으나,
개도국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몇몇 회의 참석자들은 농업분야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의 입장 차이가
이번 회의 결렬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세부적인 원인분석과 무관하게 이번 회의가 결렬된 것은 개도국들이
선진국들에 맞서 조직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 탓이라는 데는 모든
전문가들이 공감하고 있다. 즉 다자간 협상이라는 WTO의 구조상 일단
개도국들이 단결된 목소리를 낸다면 선진국들이 무조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이끌어갈 수는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의 NGO활동가들이 회의 결렬을 환영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소위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란 그 본질에서 전 세계를 미국식
신자유주의 사회로 개조하는 ‘일체화’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WTO와 FTA,
BIT등의 양자협상은 이러한 일체화에서 중요한 도구였다. 이번 회의가
결렬된 것은 이러한 미국식 일체화에 일단 제동이 걸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언론과 전문가들의 예측처럼 회의 결렬이 무조건 한국농민이나 세계의
가난한 민중들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당장 미국은 한국농업에 대해
양자간 협상을 제기하고 나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투쟁이 단
한번에 ‘멋진 결과’를 낳을 수는 없는 법이다. 비록 아직 불투명한
미래가 남아있지만, 우리는 이번 칸쿤투쟁에서 중요한 한 발을 내딛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 이정무 기자
민중의 소리